▲ 송준호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송준호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미국 연수시절 이야기이다. 필자의 영어는 말하는 것은 꽤 그럴듯한데 리스닝이 영 젬병이다. 말을 건네면 미국인들이 현지인으로 착각하고 말을 빨리하는 바람에 금세 대화가 먹통이 된다. 그래서 원활한 소통을 위해 듣기의 여왕인 아내를 항상 모시고 다녀야 했다.

아내는 필자가 리스닝이 안되는 원인에 대해 허를 찌르는 분석을 내놓았다. “당신은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즉, 못 듣는 게 아니라 안 듣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블루투스 이어폰이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필자의 작은 귓구멍까지 지적한다. 인간의 진화에서 청각기관은 점점 퇴보하고 발화기관은 점점 발달한다는 데, 필자가 그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다.

한때 인간의 언어는 정보교환을 위해 진화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그토록 복잡한 것이 왜 만들어졌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언어는 정보 교환이 아니라 결속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론이 더 인정받고 있다. 인류의 집단 규모가 커지면서 일대일의 '털 고르기' 대신, 한 번에 여럿을 상대할 수 있는 언어를 진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모여 앉아 뒷담화를 주고받으며 하나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언어의 목적이 정보교환이라면 듣는 것을 더 좋아해야 맞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듣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마디라도 더 하려다 다투고, 두 배는 더 말해야 공평했다고 느낀다. 한때 필자가 병원 업무로 관계자를 만날 때 늘 속으로 대화 수를 세었다. 이쪽 한 마디에 저쪽 두 마디 하도록 해야 필요한 정보도 얻고 상대방이 좋은 대화였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적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주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늘 자기가 말하는 시간은 부족한데 상대가 말하는 시간은 천천히 가기 때문이다. 서열이 높아 저지하지 못하면 말은 더 길어진다. 대화를 지배하면 힘과 권위, 그리고 지배의 느낌마저 든다. 권위적일수록, 꼰대일수록 말을 많이 하는 이유이다.

대화를 통해 논리적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생각을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는 달래며 조정하기 위해 진화되었지,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진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도 걸림돌이 된다. 자기 생각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확증 편향'이나, 내가 아는 세계의 정보만 가지고 판단하려는 '가용성 편향'이 대화를 망친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못만 보이고, 범죄자만 본 사람에게는 카르텔만 보이기 때문이다. 말은 필요 없고 누구 편인지나 결정하라는 '정치적 양극화'도 대화를 막는다. 여기에 '권위'까지 끼어들면 대화는 불능에 빠진다.

힘이나 헤게모니를 가진 자가 떠드는 동안, 그것이 없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다. 미국 병원에서 최고 도우미상을 받은 사람이 “Oh(오)”, “Yes(네)”, “Really? (정말요?)”, 세 단어 외에는 영어를 모르는 이민 여성이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소통전문가들은 지위가 올라갈수록,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말을 줄이고 들으라고 충고한다. 대화를 이끄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다. 우리 대통령에게도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앞으로라도 대화에서 말의 수를 세 보고, 잘 듣는 사람을 주위에 많이 두기를 바란다. 국민이 듣게 하여야지 참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송준호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